어린시절&학창시절&봉산교회시절

12년의 보건학교생활을 돌아본다(주후 1974년 3월 8일~1986년 2월 16일)

밀알공동체 시나브로 2023. 2. 13. 14:23

* *큰 뜻을 품어라(사랑, 빛, 자유)* *

* 보건학교 건학이념(*기독교*정신) *

1)*사랑*~>*하나님*과 및 이웃을 사랑하고, 만물을 사랑하며, 아껴쓰라.

2)*빛*~>세상의 *빛*이 되라.

3)*자유*~>우주와 같은, *자유*를 찾아라.

* 교육 목표*

1) 초등학교 과정: 꿈을 그리자.

2) 중학교 과정: 꿈을 가꾸자.

3) 고등학교 과정: 꿈을 펼치자.

4) 전공과 과정: 꿈을 이루자.

* 설립 목적 *

우리는, *대한민국 교육법*과 *기독교*정신에 입각하여, *지체 장애인들*에게 *유치원,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및 *전공과*에 준하는 *교육*과 그 실 생활에 필요한 *지식, 기능*및 *사회적응 교육*을 실시함을 목적으로 한다.

*주후 1966년 12월 26일*: 문교부로부터 설립인가(초등학교 과정 12학급)받음.

*주후 1967년 3월 1일*: *안 병즙 초대 교장 선생님*취임.

*주후 1967년 3월 1일~4월 28일*: 개교 본격적인 준비.

*주후 1967년 4월 29일*: 개교 및 1회 입학식.

*주후 1972년 12월 29일*: 문교부로부터 중학교 과정 3학급 설립인가 받음.

*주후 1980년 3월 1일*: *안 병즙 초대 교장 선생님*사임, *조 병수(2대) 교장 선생님*취임.

*주후 1980년 11월 7일*: 문교부로부터 고등학교 과정 3학급 설립인가 받음.

*주후 2003년 2월~12월*: 교사 신축.

*대구 보건학교*는, 주후 1966년 10월 6일 *학교법인 영광학원*의 이사회에서 특수교육을 필요로 하는, 심신장애 아동 중 교육시설이 없어 방치되고 있는 지체장애 학생 교육의 기회를 부여하기 위해서 오래 전부터 염원해 온 *지체장애 학생교육기관*인 *보건학교*를 주후 1966년 11월 5일에 설립인가를 신청하여, 그해(주후 1966년)12월 26일 문교부로부터 교육법 제 85조에 의하여 학교법인 영광학원이 신청한 *대구 보건학교 초등과정 12학급*의 설립인가를 받았다. 주후 1967년 3월 1일자로 *초대 교장*에 *안 병즙 선생님*이 취임하고, 주후 1967년 4월 29일에 *개교식*및 *제 1회 입학식*을 거행하였으며, 그 당시 신입생은 모두 27명으로, 남학생 14명, 여학생 13명이었다.

* 초등:8회, 중등:8회, 고등:3회 *

육신의 장애를 입고, 태어난 나에게도 어김없이 취학연령이 다가옴에 따라, 서울 왜 갓 댁에서의 안정된 생활을 마무리하고, 외할머니와 함께 대구로 내려와, 외할머니 어머니의 수소문 끝에, 대명동에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한국 사회사업 대학, 현 대구 대학교)의 부설로, 지체 장애인들의 교육을 위한, 특수학교(보건학교)가 있다는 것을 알아내시고, 그 왜 부수 사항들을 알아보시고, 입학 일자가 3월 8일이라는 것을 알아내시고, 나에게 입학준비를 시키셨다.

입학당일인 8일이 되자, 할머니 어머니 손에 이끌려, 코흘리개인 나는 긴장 반, 기대감 반으로 보건학교로 향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대 강당 이곳, 저곳을 바라보며, 할머니, 어머니 품에서 장난을 치다가 식이 끝나, 선생님의 안내를 받으며, 친구들과 함께 학교 교실로 돌아와, 교과서를 받고, 여러 사항들을 안내받은 후 귀가했다.

아침마다, 할머니께서는 나를 데리고, 학교에 같이 등교하셨다. (할머니와 떨어져 생활하는 불안한 나의 마음을, 할머니께서는 아셨던 것이다. 1학년 여름방학 이전까지).

선생님들께서도, “내가 할머니와 떨어져 생활하는 것이, 불안한 것을 아셨는지” 할머니께서 나를 데리고, 학교에 매일, 매일 오시는 것을 자연스럽게 대해 주셨다.

하루, 이틀 지남에 따라, 선생님의 따스한 사랑의 가르침과 선배들의 사랑의 보살핌, 격려와 친구들의 진한 우정에 힘입어, 학교생활에 적응해 나갔다.

여름방학 전, 2박 3일이나 3박 4일 일정으로 학교 대 강당에서는 대구의 목사님들을 모시고, 하계 수련회가 실시됨에 따라, 갓 입학한 나도, 선배 누나들 곁에 앉아, 생전 처음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배우고 들었다.

그렇게 1년을 흥분과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2학년으로 진급하였다.

2 학년으로 진급하니까, 귀여운 후배들로부터 이름 뒤에 “~ 누나, ~언니, ~오빠, ~ 형”이라 부르며, 2학년인, 우리를 따르게 되자, 아직도 신입생 티를 벗지도 못한 채, 책임감을 안고 생활하게 되었다.

나는, 구구단에 약해 막내 이모로부터 개인 교습을 받으며, 구구단 공부를 하였다.

막내 이모의 엄한(?) 사랑의 채찍으로, 2 학년 늦가을에 가서야, 구구단에 조금은 익숙해지기 시작하였다.

1학기 말 수련회를 마치고, 여름방학 직전에 포항 바닷가로 떠난 해양훈련은 내가 태어난 뒤에 처음 체험한 바다 체험으로, 짠물 맛만 실컷 맛본 또 하나의 신비한 체험이었다.

2 학기 초에 들어서자, 그동안 중등부 선배님들이 하셨던, 합주부 활동을 우리 초등부가 맡게 되어(주후 1975년 가을~1979년), 더욱 바쁘게 생활하였다.

손님들은 왜 이렇게 많이 오시는지, 수업시간 중에도 불려나가 아름다운 하모니를 전달하였다.

안 병즙 교장 선생님께서 작사하신, 교가도 배웠는데, 그 교가는 아래와 같다.

* * 보건학교 교가 *

1: 팔공산을 바라보는 달구벌 대명 동산에

보장보다 기회로서 새 삶을 개척하려는,

아름다운 새싹들이 참되게 자라나라고,

한 민족의 등불로서 세워진 보건 배움터.

후렴): 우리는 자란다, 힘차고 밝게

스스로 일하고 배우는 재활의 동산.

2: 낙동강이 굽이도는 사랑과 믿음 동산에

보호보다 극복으로서 새 소망 이룩하려는

오늘날의 주인들이 꿈 키워 자라나라고,

한 겨레의 샘물로서 세워진 보건 배움터.*

 

(교가 해설)

이 교가는, 주후 1966년 개교 당시 안 병즙 초대교장선생님이 글을 만드시고, 김 관일 선생님이 곡을 만드셨다. 1절은 삶에 대한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있고, 2절에서는 강한 장애극복 의지를 나타내어 자립과 재활에 대한 밝은 미래를 노래하고 있다. (학교 역사관에서)

 

다음카페: http://cafe.daum.net/vocat/72x/93:교가연주곡

 

재활과 장애 극복의 의지가 가득히 담긴, 교가라고 생각해 본다.

속절없는 시간은 흘러, 어느새 3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3 학년으로 진급하자, 우리는 더 이상 선배님들께 응석만 부리는 후배가 아니라, 1 학년, 2 학년 후배들이 따라야 할, 그렇기에 모범을 보여주어야 할 선배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깨달았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우리들은, 더욱 더 열심히, 더욱 더 올바르게 교내 생활에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였다.

공부 외에 합주 부 활동도 맡고 있었던 터라, 그 무엇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친구들과의 우정도, 쌓아나가는 데에도 여념이 없었다.

선생님들께서도, 다방면에서 열심히 하는 우리를 향하여,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니까 우리들은, 더욱 더 열심히, 올바르게 하기 위해 의지를 가지고 공부하며, 활동하게 되었다.

시간은, 과녁을 향해 날아가는 화살보다 더욱 빠르게 흘러, 어느새 4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어느새 4 학년이라, 우리들에게는 학업생활, 합주 부 활동 등,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생활이 이어졌다.

그러나 우리들은 더욱 더 열심히 해 나갔다.

나는, 생전 처음으로 여자 친구(김 효정)와 짝이 되어, 1년 동안 같이 생활하게 되었다.

공부하다가 의문이 생길 때마다, 짝에게 묻고, 짝도 내가 이해하기 쉽게, 친절하게 내게 가르쳐주었고, 다방면에서 나를 잘 이해해 주며, 보살펴 주었다.

여자 짝꿍으로 인해, 나는 더욱 열심히 공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 나의 모습에, 선생님께서도 기뻐하셨으며, 짝꿍인 효정이도 행복해 하였으며, 더욱 더 꼼꼼하게, 보살펴 주며 도와주었다.

짝꿍과 내가 헤어지는(?) 시간은, 아침, 오후 등. 하교 시간뿐으로, 짝꿍은 학교에 있는 시간동안은, 언제나 내 곁에 있어 주었다.

봄에는, 6학년 선배들과 함께 경주로 수학여행을 가, 통일 신라의 얼에 흠뻑 젖어 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10월 말이 되자 문서 선교를 펼치는, 한국 기드온 협회로부터 “구약”의 “시편”과 “신약”이 합본된 “성경”을 기증받아, 성경 말씀을 읽으며, 겨자씨만한 믿음을 키워나갔다.

그리고 겨울 방학을 앞둔 12월 초, 우리들은 서울 정립회관에서 실시하는 재활 수련회에 참여하여, 재활과 장애 극복의 의지를 다지기도 하였다.

화살보다 빠른 시간이 흘러, 어느새 5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벌써 초등학교 졸업을 2년 앞둔 5 학년이라, 초등학교 시절을 어느 정도 정리하고, 중학교 진학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었다.

나에게 다가온 첫 번째 행운! 중등부에 입학한 “최혜인” 누나를 알게 된 이후부터는, 수업시간만 제외하고는, 누나의 과잉보호 속에 생활하기 시작하였다.

누나와 나는, 같은 첫 차를 타게 되었으며, 누나가 내 앞에 타기에, 누나가 내 자리를 지켜 주었으며, 내가 타면, 누나는 내 손을 잡아 데리고 가, 자기 옆에 내가 편안히 앉도록 세심하게 배려해 주었다.

좀 피곤할 때면, 누나의 포근한 품에 안겨 눈을 좀 붙일 수 있도록, 보호해 주며 배려해 주는, 누나가 너무, 너무, 너무 고마웠고, 따뜻한 누나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께 너무, 너무, 너무 감사드렸다. (*주님*, 너무,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멘.)

그리고 누나 품에 안겨있을 때, 나는 이 세상에서 두려울 것이 아무것도 없이, 너무, 너무, 너무 평안하고 행복했고, 그 어떤 악한 세력도, 나를 헤칠 수 없었다.

5 학년 여름방학 이전에, 벌써 누나와 나는, 눈빛만 봐도, 서로의 상태를 다 파악할 수 있었다.

내가 심한 괴롭힘을 당할 때, 다른 선배들은 모두 외면했지만, 혜인이 누나만큼은 내 곁에서, 나를 아주, 아주, 아주 포근히 과잉보호해 주며 감싸주었다.

혜인이 누나가, 나만을 끔찍이 보호해 주자, 나는 누나만을 더욱 더 따르게 되었다.

그러니까, 누나는 나만을 더욱 더, 끔찍이 감싸주며, 과잉보호해 주었다.(마치 엄마처럼).

그리고 10월 서울에서 개최된, “전국 특수학교 학생 기능 경진대회”

아뿔싸, 우리 합주 부가 포함된 경진대회로서는, 마지막 경진대회가 될 줄이야 누가 알았겠는가?

그 이유는, 음악부에서 수상하는 상이 너무 많기 때문에, 79년 대회부터는 음악부를 제외시킬 예정................

그런 일을 눈치 챈(?) 우리들은, 더욱 더 아름다운 화음을 전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그렇게 경진대회를 마치고 대구로 내려오는 길에, 부여의 백제 유적을 관람하고, 보건학교로 돌아왔다.

5 학년을 *하나님* 안에서 마무리하고, 졸업반인 6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6 학년으로 진급하자, 우리들의 생활은, 초등학교 마무리, 합주 부 활동 등으로 더욱 더 바쁘게 이어졌다.

그렇다고 어느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할 수 없었다.

6년 동안, 같은 반에서 공부했으며, 특히 4 학년 때는 1년 동안 나의 같은 단짝으로서, 나를 많이 꼼꼼하게 도와주었으며, 보살펴 주었던 효정이가 다른 중학교로 진학한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나 개인적으로는, 엄청 허전했으나, 그렇다고 나의 유익을 위해, 효정이를 보건 중학교에 머물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런 허전하고, 아쉬운 나의 마음을 눈치 챈, 효정이는 그런 일에 상관없이, 여전히 나를 더욱 더 꼼꼼히 보살펴 주었다.

1년 지나면, 다른 중학교로 진학하는, 사랑하는 친구들과 우정을 견고히 쌓는 데, 여념이 없었다.

같은 중학교(보건 중학교)로 진학하는, 친구들과의 우정은 중학교에 진학해서 쌓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 와중에, 4 학년 때 담임이셨으며, 효정이와 나를 단짝으로 맺어 주셨으며, 소심했던(?) 나에게 크나 큰 용기와 자신감을 심어 주셨던, 양 영석 선생님께서 전근 가신다는 소문이 교내에 펴져 나갔다.

나는, 깜짝 놀라 그때 선생님 반이었던, 혜인이 누나에게 물어보니 사실이 아닌가?

5월말에 선생님께서, 교실에 들어오셔서 따뜻한 손길로 우리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 “열심히 공부하며, 건강해라”라고, 격려해 주시며, 부산 혜성학교로 전근가셨다.

남해안 충무공 이 순신 장군의 유적지로, 수학여행을 갔다 온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초등학교 생활을 차분히 마무리하기 시작하였다.

6 학년(주후 1979년) 가을로 접어들자, 우리들이 초등학교 졸업준비로 더욱 더 여념 없던 차에, 국가의 지도자(=대통령)가 자기의 최측근에 의해, 총살당하는 10.26 사태가 일어나고, 국가는 비상시국의 상황으로 빠져들었다.

비록, 비상시국의 상황이지만, 우리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각자의 위치에서 올바르게 생활하였다.

그렇게 혼란했던 1979년 연말을 보내고,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에 진학할 1980년 새해가 밝았다.

 

1980년 2월이 오자, 우리들은 졸업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다.

짧다는 2월이, 특히 우리 졸업반에게는 너무, 너무, 너무 더욱 더 짧게 느껴졌다.

벌써, 초등학교 졸업이라!

나의 뇌리 속에 나의 14년 동안의 세월이, 생생한 동영상처럼 스쳐 지나갔다.

“시간이, 오늘 이 시간에서 영원히(?) 멈추어 버렸으면, 얼마나 좋을까?..................”

재학생 대표로, 효정이가 작년까지 3~4년 동안 도맡아 하던, 재학생 송사를 사랑하는 후배로부터 듣는 순간, 가슴 뭉클함과 가슴 찡함이 느껴졌다.(특히, 효정 이에게는).

그렇게 아쉬움 속에서, 눈물의 졸업식을 마치고, 대 강당을 나와, 친구들과 같이 6년 동안 같이 공부하며, 함께 웃고, 떠들며, 울던, 학교 교실로 돌아와, 상장, 졸업앨범, 졸업선물로 가방을 받고, 추억이 깃든 교정에서 정든 친구들과 사진을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막상 졸업하고, 중학교에 입학하기까지 열흘 기간 동안 집에만 있으니깐, 좋기도 하였으나 약간은 지루하기도 하였다.

학습에서 미진했던 부분을 보완하며, 타락하고, 악랄한 사탄인 일본 제국 시대의 잔재인 교복도 마련하며, *하나님* 은혜로 3월 입학을 준비하였다.

정은 이는, 같이 입학했으나, 여학생들은 교복을 여름 교복(하복)부터 입기에, 교복을 한꺼번에 마련해야 한다는 부담 아닌 부담에서 벗어나, 할머니 어머니께서 마련해 주신, 교복과 모자..............

드디어 3월 6일, 나는 교복차림으로 할머니 어머니와 같이, 보름 만에 다시 학교로 향했다.

다시 만난 선생님들과 친구들과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며, 곧바로 식장으로 향해 입학식에 참석함으로써, 나의 중학교 생활 *하나님* 안에서 시작되었다.

입학식을 통하여 새로운 각오를 다진 우리들은, 선생님들, 선배님들, 친구들, 후배들과 함께 학교로 돌아와, 교실에서 선생님으로부터 교과서를 받고, 앞으로 시작 될 중학교 생활에 관한 안내와 주의 사항 등을 전달받았다.

나는, 교과서를 받자마자 영어 교과서부터 훑어보았다.

그야말로, 꼬부랑글씨 일색이었다.

영어 교과서를 보면서, 단어부터 익히기로 마음먹었다.

때마침 영어 담당 선생님이, 자상하신 이 을숙 선생님이셨기에, 담당 선생님의 꼼꼼하신 사랑의 지도로, 단어 하나, 하나 써가며, 그리고, 친구 옥란이와 현준이의 도움과 격려로 열심히 공부하였다.

이 을숙 선생님께서는, 과제를 내 주실 때에도 2 가지 과제를 내셨다.

나를 제외한, 다른 친구들에게는, 다른 과제(예를 들면, 영어 문장을 우리말로 해석하라. 등)를 내 주셨다면, 나에게만은, 거의 1년 내내 단어 쓰며, 철자들을 암송하는 과제만을 집중적으로 내 주셨다.

그런 선생님의 자상하신 지도의 결과로, 나는 1 학년 말부터 영어 과목에 점점 자신감이 붙기 시작하였으며, 그런 나의 진보에 이 을숙 선생님께서 가장 기뻐하셨으며, 더욱 더 꼼꼼하게 지도해 주셨다.

입학하자마자, 최규하 대통령께서 방문하셔서, 우리들을 격려하시며, 우리 학교의 소원인, 고등학교 3개 학급의 설치를 건의 받으시고, 설치인가를 약속받아, 80년 말에 고등학교 3개 학급의 설치인가를, 문교부로부터 받았다.

그러나 나에게도 아픔의 시간이 있었으니, 입학 초기에 직업 과목을 목공으로 정해 목공을 한창 하는 틈에 조각칼을 든 손을 잘못 놀려 왼손을 찔리는 사고가 발생해, 나는 담당 선생님과 함께 학교 근처 병원으로 가서 치료받는, 아픔의 시간도 있었다.

이 일로 인해, 목공을 할 때 나무판을 놓고, 목공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어머니는 내가 수술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를 알아보시기 위해, 봄부터 여수로 수술 받으러 가는, 소아마비 친구들을 따라 여러 차례 대구와 애양 병원 사이를 갔다 오셨다.

그 때는, 뇌성마비 장애인들을 위한, 수술은 불가능한 시절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구와 애양 병원 사이를 꾸준히 다녀오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통해, 장애 입은 자녀를 사랑하는 모성애를 엿볼 수 있어 감사했다.

* 난아야 너는 * * 중1 박 옥란 *

중학교 입학식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집안이 조용해지자 어머니께서는 나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난아야, 네가 이렇게 커서 어엿한 중학생이 되다니, 이 엄마는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단다.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가 계셔서 도와주시니 조금 힘이 덜 들겠지만, 이 엄마는 혼자서 두 사람 몫을 하려니 무척 힘이 드는구나. 아빠가 계시다구는 하지만 멀리 서울에 계시니 자주 자주 오시지도 못하시니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구나.

난아야 너는, 여태까지 이 엄마를 잘 도와주었으니, 다시 한번 이 엄마를 도와주렴. 난아야, 이 엄마를 돕는다는 것은, 공부 열심히 하고, 바이올린, 피아노 레슨 열심히 받아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란다.*

*네 어머니 말씀 잘 알아듣겠어요. 그리고 어머니가 기대하시는, 훌륭한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어요. 어머니 울고 계시는군요. 이렇게 기쁜 날, 왜 우세요! 어머니 울지마세요.*

*미안하구나, 이렇게 기쁜 날 울어서, 하지만 아무리 참아도 눈물이 나오는구나. 하지만 이 눈물은, 슬프고 괴로워서 흘리는 눈물이 아니라 기뻐서 우는 것이란다.*

나는 이런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어머니의 말씀이 나의 가슴속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그래 하자, 열심히 공부해서 어머니께서 원하시는 훌륭한 학생이 되자.*

어머니에게 효도하는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다.

* 주후 1980년 4월 29일에 발행된 북극성에 실린 단짝 *옥란*이의 글*

아니 벌써 2 학년이라!

1981년은, U. N에서 정한, *세계 장애인의 해*!

장애인들을 위한 행사들이,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전 세계적으로 연초부터 펼쳐지기 시작했으며, 소외 계층을 위한 공약들이 줄 이어 나오기 시작했다.

우리 장애인들은, 전시용 이벤트성 공약들, 행사들은 당연히 거부하며, 또 거부한다.

전시용 이벤트성 공약들, 행사들은, 장애인들 가슴에, 또 그 부모들, 친척들, 가족들 가슴을 피멍들게 만드는, 아주, 아주, 아주 잔인한 작태이기 때문이다. (특히, 꼴통 보수 쓰레기 패거리들은, 이벤트성. 전시용 공약들, 행사들을 아주, 아주, 아주 좋아한다.)

중. 고등학생들의 두발, 교복 자율화(2년 후 실시) 발표가, 연초에 나왔다.

우리들은, 정통성 없는 정권이 우리 중. 고등학생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정책임을 알았으며, 한편으론 좋기도 하였으나, 한편으론 걱정도 되었다.

가을에 국어숙제로, 국어 담당 선생님께 편지 쓰는 숙제가 나왔는데, 나는 선생님께 답장을 요청해 답장을 받았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 홍 광석 선생님께 받은 편지 *

* 상 욱 보거라 *

너의 글을 읽어보니까, 너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열심히 공부하려는 너의 노력이, 꼭 아름다운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나도 돕겠다.

네가 부탁한 문제는, 내가 꼭 답을 해 주지 않아도 네가 스스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마는 굳이 내 의견을 이야기 하자면, 국어 공부를 비롯한 모든 공부에는 어떤 일정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은, *공부란, 곰 같이 하는 것이다.*이다. 무슨 말이냐 하면, *성급히 어떤 결과를 기대하지 말고 꾸준히, 남이 무슨 말을 하든지 *자기의 할 공부를 열심히 하는*것이, 학생의 공부하는 태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첨가해서 네게 해 주고 싶은 말은, *방학 동안에 말야, 국어 교과서를 공부하는 것도 좋지만, 특히 한국 문학 전집, 세계 문학 전집, 그리고 국어책의 뒤편에 나오는 한자를 주로 공부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물론 문학 서적은 읽으면, 네 자신의 교양에 크게 도움도 되고, 국어 공부 하는 데도 매우 유익한*것이기 때문이다.

거기에 더 보탠다면, 신문을 보면서 한자를 익히면 매우 보탬이 된다는 사실도 얘기하고 싶구나.

끝으로 *공부란, 한 과목에만 열중하지 말고, 전체 과목에 걸쳐서 골고루 신경을 써서 공부해야*하는 것이니까 꼭 명심하기 바란다.

어떻게 글을 쓰다 보니까, 극히 사무적인 내용에서 그친 것 같다.

너와 나의 아름다운 마음의 얘기가 오고 가기를 마음으로 빈다.

네 공부하는 데,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다면 다행으로 생각하겠다.

열심히 네 직분을 다할 것을 기대하면서 이만 줄인다.

* 주후 1981년 11월 24일, 홍 광석 *

그리고 연말에는 저물어 가는, *세계 장애인의 해*를 기억하며, 서울 정립회관에서 실시된 *장애 청소년 수련회*에 참석하여, 재활과 장애 극복의 의지를 *하나님*안에서 다지기도 하였다.

 

벌써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해야 하는, 3 학년으로 진급한 우리들은, 12월 연말에 있을 연합고사 준비로, 3월 초부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야 했다.

* 어 머 니 *

야간통행금지가 해제된 후로는, 어머니는 잠 한숨 제대로 주무시지 못하시며 장사를 하신다. 오늘도 여늬때 처럼 밤 1시가 넘도록, 장사를 하시는 어머니와 함께 자려고 기다리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누군가 나를 이불위에 눕혀주는 것 같아서 눈을 살며시 떠보니, 피로에 지친 어머니의 모습이 희미하게 비치는 것이다. 오늘따라 어머니가 전보다 무척 늙어 보이는 것 같아서, 눈물이 나오려고 하는걸 참으며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고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시간을 이대로 멈출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도 더 크지 않고, 어머니도 더 늙지 않으시며, 항상 내 곁에 계실 수 있을텐데... 하지만 시간은, 멈춰주질 않고 계속 흐르며 어머니를 늙게 만들고 또 언젠가는 돌아가시게 될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면, 시간이 흐르고 세월이 가는 것이 그렇게 미울 수가 없다.

*왜 시간은, 흘러 가야만 하는가?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을지라도 멈출 수는 없을까?*하는 의문이 난다. 어린 시절이 그리워진다. 내가 어렸을 때는, 어머니도 그만큼 젊었다. 그런데 지금은, 나를 위해 수고하시고 걱정으로 지내시니 그 곱던 얼굴에 주름살이 하나 둘 자꾸만 생기며, 어느덧 곱고 예쁘시던 어머니는 할머니가 되어 간다. 그렇지만 나는 이런 어머니가 좋다. 얼굴에 주름살이 있어도, 할머니가 되어도, 역시 어머니는 내게 있어서 제일 소중하다. 또 이렇게 된 것도, 다 나를 위해 걱정을 많이 하셨기 때문이 아닌가?

나는 이런 어머니를 앞으로도, 언제나 존경하고 좋아할 것이다.

어머니 고맙습니다.

* 주후 1982년 4월 29일 발행된 북극성에 실린 단짝 *옥란*이의 글 *

보건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친구들은, 그런대로 여유가 있었으나(?) 일반 고등학교로 진학하는 친구들은, 그야말로 총. 칼 없는 임전 상태로 돌입하였다.

그런 눈코 뜰 새 없는 바쁜 상황 속에서도 우리들은, 9년 동안, 3년 동안 쌓아놓은 우정을 더욱 더 아름답고, 공고히 유지할 방안을 찾았으며, 우리들만의 자치모임(우정의 샘)을 결성하기로(?) 뜻을 모으고, 여름 방학 전부터 현준 이를 중심으로 그 준비에 착수하였다.

공부하랴, 모임 규약 만들랴,............ 모두들 땀 좀(?) 흘렸다.

보건 고등학교로 진급하게 됨에 따라, 보건 고등학교로 진급하는 친구들에게 모임일정 등을 알려 주는 역할을, 부족한 내가 맡게 되었다.

그런 바쁜 와중에서도, 여름 방학 중반(8월 초)에, 머리도 식힐 겸 친구들과 가족들과 함께, 용인 민속촌에 가서, 살아있는 역사 공부를 하였다.

우리 선조들의 생활 모습은 어떠했으며, 그 생활 모습이 어떻게 계속 진화되어,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생각하면서, 유익하게 관람도 하며, 많은 공부도 하게 되어, 우리 역사를 조금이나마, 올바르게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여름 방학을 끝내고 개학하자,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연합고사 준비, 고입 원서 준비등으로 더욱 더 분주하게 움직였다.

나는, 3년 뒤에 있을 학력고사에 응시하기로 하고, 고입 연합고사에는 응시하지 않기로 했다.

분주하고 분주했던, 1982년을 *하나님* 안에서 보내고,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진학해야 될, 1983년을 *하나님* 안에서 맞이하게 되었다.

우리들의 자치모임인, “우정의 샘” 결성에 박차를 기해, 조직과 틀을 갖추는 등, 분주하게 움직여, “우정의 샘”을 졸업 열흘 전에 만들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중학교를 졸업할 당일이 밝자 우리들은, “할머님”, “어머님”들과 함께 학교로 향해, 학교에 도착하였고, 선생님들, 친구들, 선. 후배들과 함께 식장에 도착, 자리를 잡은 후, 눈물의 졸업식이 진행되었다.

졸업식이 진행되는 속에서도, 우리들은 “그 동안 쌓아놓은 우정을, 지속적으로 유지해 나가자”라는, (눈빛으로) 무언의 약속을 하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님*, “할머님”, “어머님”께 감사를 드렸다.

“내가 아무리 공부하고 싶어, 몸부림 쳤어도, [*하나님*, 할머님, 어머님]의 은혜와 도우심이 없었더라면, 나의 행복했던 학교생활은 불가능했으리라” 생각되어 뭉클했다.

졸업식을 마치고, 학교 교실로 돌아온 우리들은, 졸업 증서, 상장, 가방, 졸업 앨범 등을 받고, 친구, 가족들과 기념사진을 찍고, 3월 입학식에서, 우정의 샘 모임에서 건강하게 만나기로 약속하고, 집으로 향했다.

집에서 달콤한 휴식을 취하는 것은 좋았으나, 중학교와는 또 다른 고등학교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하는 데에도, 나름대로 바빴다.

 

 

짧은 휴식의 시간은, 어찌 그리 초고속으로 흐르는지, 벌써 고등학교 입학이 내일로 다가와, 나는 더욱 분주하게 움직였다.

드디어 입학 당일이 되어, “할머님”, “어머니”와 함께 학교로 향했다.

약 보름(15일) 만에 건강한 모습으로 다시 만난, 존경하는 선생님들, 사랑하는 선배님들, 친구들, 후배들과 반가움의 인사를 나누며, 입학식에 참석함으로써 고등학교 생활이, *하나님* 안에서 힘차게 시작되었다.

입학식이 진행되는 가운데서도, 우리들은 “이제 막 시작 될 고등학교 시절을, 어떻게 규모 있게 보낼 것인가? “라는 생각을..........

*하나님* 안에서 입학식을 마친 우리들은, 다시 교실로 돌아와 교과서를 받고, 내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될, 고등학교 생활에 대한 안내를 받고...............

중학교 시절과는 달리, 고등학교 시절은 1 학년부터 착실히, 그리고 꾸준히 공부하지 않다가, 3 학년에 올라가자마자, 열심히 해 봤자, 헛수고일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던 터라, 1 학년 초부터 고삐를 조울 수밖에 없었다.

나는 옥란이의 도움으로, 고등학교 초반부터 잘 적응해 나가기 시작했다.

옥란이는, 내가 어려움에 빠질 때 마다, 내 편에 서서 나를 보살펴 주며, 도와주었다.

그래서 나는 옥란이와 보조를 맞춰 가며, 공부도 하며,..................

고작 6명뿐이라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선의의 경쟁으로 살벌해진 학습전쟁(?)

학교 공부는 시간표대로 하면 되었지만, 집에서의 온전한 예. 복습만이 승부의 관건이라는 것을 인식하고, 예, 복습을 온전히 하기로 결심하고, 나름대로 실천에 들어갔다.

그렇게 실천하기엔 만만하지 않았지만, 선생님들과 및 옥란이의 세밀한 보살핌 속에서 열심히 공부해 나갔다.

그런 나의 모습에, 선생님들께서도 매우 기뻐하셨으며, 옥란이도 초등학교 4 학년 때, 나의 단짝 효정이가 내게 보여 준 반응과 같은 반응을 보여주었다.

졸업반인 혜인이 누나는, 변함없이 꾸준히 나만을 보살펴 주었다.

세 달에 한 번씩 모이는, “우정의 샘”

기쁘기도 하고, 반갑기도 하였다.

[모여서, 정보도 나누며,(교환하며), 기쁨도 나누며, 고민도 나누는 속에서, 그 가운데서 해결책,= 대안도 모색하는 순수한 자리로, 자리매김 했으면 좋겠다는 순수한 마음에서, “우정의 샘”을 조직했던 것이었다.

“우정의 샘” 모임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히자, 우리 모임을 질투하는 세력(?)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그런 일과는 상관없이, 우리는 모든 일에 최선을 다했으며, 모범을 보였다.

중학교 입학부터, 나만을 끔찍이 보호해 주며 아껴주었던, 혜인이 누나가 졸업함으로, 내 곁을 떠나, 사회 속으로 들어감으로, 나는,...............................

그러나 속절없는 시간이 흘러, 어느 새 2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2 학년으로 진급하자, 부족한 나에게도 한 학급의 상반기 살림을 책임지는, 회장의 직무가 주어져, 부회장인 옥란이와 함께, 끝도 없이 벌어지는, 학급 살림을 보았다.

비록 (행사들도 유난히 많았던) 6 개월이었지만, 우리 두 사람은 규모 있게, 알차게 학급 살림을 살음으로써, 학기 말이면 어김없이 적자만 내던, 학급 제정에 (최초의)흑자를 내어, 하반기 회장, 부회장에게 인계를 하였다.

담임선생님께서도, 옥란이와 나의 규모 있는 학급 살림에 매우 흡족해 하셨으며, 격려와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러자, 옥란이와 나는 둘이 한 몸이 되어, 학급 살림을 더욱 더 신 바람나게, 알차게 해 나가니까, 행복한 우리 두 사람을 질투하는 세력(?)이 나타나기까지 하였다.

나의 시험 성적이 떨어져서, 내가 풀이 죽어 있을 때 옥란이만큼은, 나를 걱정해 주며. 더욱 더 꼼꼼히 보살펴 주었다.

옥란이와 나는, 참고서와 문제집 등을 같이 보며, 부족한 점은 서로 보완해 주며, 열심히 공부하였다.

머리도 식힐 겸, 10월 중순 서울에서 개최되는 경진대회에 참여해, 그 동안 익혀 온 기량을 마음껏 발휘하며, 오랜만에 서울 구경도 하였다.

경진대회에서의 나의 출전 종목은 목공이었으며, 중학교 1 학년 시절의 직업 시간의 나의 부상을 알고 있었던, 옥란이는, 대회당일 아침에 나를 불러, 특별히 조심, 또 조심하라고 격려해 주었다.

그래서 인지 모르겠으나(?) 물론 *하나님*의 특별한 보호하심과 맞물려 아무 사고 없이, 대회를 마쳤다. (*하나님*, 감사드립니다. 아멘, 옥란아 고마워.)

공부로 인해, 메말라지기 쉬운, 나의 마음을 정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찾던 가운데, 때마침 10월에 있는, 교내 독서 감상문 공모에 응모해,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하였다.

바쁘고, 바빴던 2 학년도, 살 같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과 함께 묻어 버리고, 최고 학년이자 졸업반인, 3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3 학년으로 진급하자, 옥란이와 나는 우리끼리(우리 두 사람만)의 학습 시간을 짜서, 본격적으로 공부에만 전념하였다.

달마다 연속으로 이어지는, 모의고사, 중간고사, 기말 고사로 정신없었지만,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리고, 옥란이와 나는 차분하게 그리고, 열심히 준비해 나갔다.

참고서들과 문제집들을 같이 보면서, 열심히 준비하였다.

수업 시간에도, 문제집으로 수업하게 됨에 따라, 수업 시간만 되면, 나는 옥란이 옆으로 가 앉아, 같이 공부하였다.

그리고 집에 오자마자, 숙제만 한 다음, 수면을 취하고, 새벽 2시~3시 사이에 일어나, 내가 자신 있는 과목부터 공부하기 시작하였다.

중간고사, 기말 고사 시기에는, 옥란이가 참고서와 문제집 등에 체크해 준 내용들만 보면서, 중간고사, 기말 고사를 준비하였다.

그리고 5월에는 강릉 동해안과 설악산으로 수학여행을 가서, *우리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아름다운 자연을 관람하면서, 공부로 메말라가던.....

그리고 이튼날 새벽에는 중 3 담임이신 신 동경 선생님(화학, 생물 담당)과 단 둘이 말로만 듣던, 경포앞바다 일출을 같이 보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바쁜 틈을 내어, 3 달마다 모이는, “우정의 샘” 은 어느 새 우리의 활력소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내가 오른손을 다쳐, 약 보름 동안 밥도 못 먹게 되자, 옥란이가 밥을 먹여주며, 참된 우정을 실천하였다.

“어려움 함께 나누리~~” 노래의 아름다운 가사처럼, 옥란이와 나는 진한 우정을 나누며, 코앞으로 다가 온, 학력고사를 같이 준비하였다.

그렇게 오랜 시간을 공부한 결과를 평가받는, 학력고사 당일이 되어 초등학교 친구 준표 아버님의 차를 타고, 어머니와 함께 수험장(경북대 사대 부속 중, 고등학교)으로 향했다.

그러나 남. 여 수험생들은 따로, 따로 시험을 보기에, 옥란이와 나는 아쉽게도 서로 다른 수험장에서 시험을 보기에, 나는 더 긴장해 그 동안 공부했던 내용들이, 잘 떠오를까 염려되었다.

그래서 기도드리는, 차분한 마음으로 임했더니, 처음의 긴장이 사라지고,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평안으로 믿음 약한 나를 사로잡아 주시어, 차분하게, 신중하게 한 문제, 한 문제 풀어나갔다.

내가 자신 있는(?) 문제부터 풀어 나갔더니, 안될 줄 알았던 시간 안배도 잘 되어 내가 정답을 이면지에 기입하여, 감독 선생님께 제출하면, 선생님은 답란에 답을 쓰시는 동안, 나는 같은 답을 이면지에 기입하여, 집에 와서 T. V로 방송되는 문제 풀이 방송을 보면서, 나대로의 점수를 매겨 보았다.

결과 140 문항을 맞췄다는 사실을 알자, 가족 모두 “잘 쳤다”라고 칭찬하시며, 기뻐하셨다.

이튿날 학교에 가자, 교실은 어제 끝난 학력고사 이야기로 들썩, 들썩 거렸다.

나의 선전에, 역시 옥란이가 가장 행복해 하며, 아낌없이 나를 축하해 주며, 격려해 주었다.

옥란이와 나는 오랜만의 휴식다운 휴식을 취하며, 12년의 학교생활을 돌아보며 정리하는 가운데, “12년 동안 쌓아 온 우정을 잘 간직하자“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해가 바뀌고, 또 졸업 할 날짜가 점점 다가오자, 나의 마음은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하였다.

“졸업 후, 과연 나는 무엇을 하지?”

“어릴 때와 학교 다닐 때는, 할머니, 어머니, 선생님들의 보호와 사랑 속에 생활해 왔지만, 이제부터는, 내가 내 미래를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러나 학교 졸업은 현실이었기에, 불안하지만, 담담하게 받아들이기로 하고, 차분하게 정리하며, 졸업 후를 준비하였다. (물론, 옥란이의 도움이 컸다.)

졸업할 당일이 되어, 할머니 어머니와 함께 눈물의 졸업식에 참석하였다.

옥란이는, 자기 옆에 내가 앉게 해 줌으로써, 우리 두 사람의 행복하고, 특별한 우정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졸업식이 진행되는 시간 동안, 옥란이는 내 손을 꼭 잡아 주었다.

나의 뇌리 속에는, 어린 시절부터 지금 이 시간(고등학교 졸업)까지의 영상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코흘리개인 나의 손을 잡고, 입학식에 참석하시던 외할머님 어머니의 모습에서부터, 초등학교 1학년 때, 할머니께서 내 옆에 안 계셔서 울 때, 포근히 감싸주셨던 *이 학영 담임선생님*의 모습, 합주하던 모습, 휠체어 타는 친구들의 휠체어를 밀어주던 모습, 효정 이와 짝으로 1 년을 같이 생활했던 일, 혜인이 누나와 가깝게 생활했던 일, 옥란이와 단짝으로 생활했던 일 등이 떠올랐다.

그러나 무엇보다 소중했던 일은, *하나님*과 전혀 상관이 없던 나를, *하나님*께서 특별히 택해 주시어, 기독교 재단에서 운영하는 대학의 부설 특수학교로 나를 인도해 주셔서, *하나님* 믿는 은혜 주신 *하나님*...................

부족한 나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길러주신, 외할머님, 어머님, 애정으로 보살피며, 가르쳐 주셨던 선생님들, 혜인이 누나를 비롯한 여러 선배님들, 효정이, 옥란이를 비롯한, 사랑하는 나의 친구들, 그리고, 부족한 우리들을 선배로 믿고 따라 준 후배들에게 감사와 고마움을 전하며, *하나님*께 모든 영광을 올려 드리며, 12년 동안 정 들었던, 보건학교 교문을 나섰다.

* 보건 학교 재학 시절에, 기억에 남는 일 *

1. 여름 수련회에서, 처음 *하나님*을 구세주로 영접함.

2. 합주 부 활동(주후 1975년 가을~ 1979년 12월).

3. 효정이와의 짝꿍 생활(주후 1977년 3월~ 1978년 2월).

4. 캠프 생활.

5. 학교 급식(매주 목요일, 1975년 중단)

6. 수학 여행(주후 1977년~ 1985년).

6. 성경책 기증받음(주후 1977년 10월).

7. 혜인이 누나 만남(주후 1978년 3월).

8. 경진대회 참석(주후 1974년~1985년).

9. 옥란이와의 특별한 우정 나눔(주후 1980년~ 1989년 8월).

10. 가족들, 친구들과 같이, 용인 민속촌 관람(주후 1982년 8월).

11. 자치모임, “우정의 샘” 활동(주후 1983년~1986년).

12. 회장으로 활동(부 회장: 박 옥란, 주후 1984년 고 2학년 1 학기).

13. 2회에 걸친 서울 정립회관에서의 재활 수련회(주후 1977년 12월, 1981년 12월).

14. 성경책 기증받음(주후 1977년 10월)

* 상욱이의 담임 교사 *

초등 1 학년-> 이 학영 선생님.

초등 2 학년-> 장 재익 선생님, 조 병수 선생님.

초등 3 학년-> 조 병수 선생님.

초등 4 학년-> 양 영석 선생님.

초등 5 학년, 중등 1 학년-> 박 석돈 선생님.

초등 6 학년-> 정 재권 선생님.

중등 2 학년-> 이 을숙 선생님.

중등 3 학년, 고등 2 학년-> 황 홍만 선생님.

고등 1 학년, 고등 3 학년-> 오 세철 선생님.

* 옥란이가 나에게 보낸, 성탄 card와 편지 *

상욱아, 새해 복 많이 받고, 내년에는 네가 소망하는 모든 것들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정은이도 원하는 대학에 꼭 가기를 바래.

그리고 앞으로 좋은 친구가 되길 나도 원해.

너의 길에 은총이 내리길…….

*주후 1985년 12월 24일, 친구 옥란이가*

상욱에게

상욱아, 그 동안 잘 있었니?

서울에는 무사히 도착했니?

너네 집에 한번 전화하니까, 아무도 받지 않더라.

그래서 서울에 갔는가 하고 생각했지.

어떻니? 서울에 있으니까 좋으니?

그리고 너, 언제쯤 대구에 올거니?

편지에는, 5월 달에 못 올거라고 써 있던데.

좋은 일이 생겨서 오래 있는거니? 아니면, 나쁜 일이 생겨서 그런거니?

좋은 일이 생겨서, 늦게 오는 거라면 좋겠다.

그리고 책은, 네 말대로 9월 달에 바꾸자.

요즈음, 나는 피곤해서 그런지 온 전신이 아픈 게 움직이면,

우두둑, 우두둑 뼈에서 소리가 나, 꼭 부러지는 것 같아.

그리고 상욱아, 뭐랄까? 다른 사람들은 남. 여 간에 친구가 어디 있고, 우정이 뭐냐고 그러지만, 우리는 12년간 같은 학교, 같은 반에서 생활했지 않니? 서로가 서로에게 도움과 격려의 말을 해 주며 지내잖니?

그러니까 우리 졸업했다 해서, 모르는 척 하지 말고, 서로 연락하며, 기쁜 일, 슬픈 일 함께 나누자. 그러면, 너와 나는, 남들이 말하는 것처럼 우정이 깨지지 않고, 영원히 지속될 수 있지 않겠니?

물론 내가 여자라, 나에게 말 못할 사정은 할 수 없지만, 그 외에는 서로 터놓고 지내자.

뭐랄까? 남자와 여자라기보다는, 단순히 친구라는 생각으로 지내면 편안할거야.

환절기에 몸 조심해.

시간이 너무 늦어서, 잠이 자꾸 오는데 이제 이만 줄일께.

그럼 잘 있어, 답장 할 수 있으면 해.

혹시, 내가 답장을 못하더라도 이해하고, 서울에 있는 동안 편지 자주 해.

그리고 대구에 오면 연락해, 안녕.

*주후 1986년 5월 20일 친구 란 이가*

 

* 교목, 교표, 교화 *

1) *교목(*느티나무*)*: 느룹나무과의 낙엽 활엽수로, 분포지역은 *한국, 유럽, 몽골, 일본, 중국, 시베리아*이며, 촌락 부근의 산기슭이나 골짜기에 잘 자라는데, 그늘이 넓어 정자나무로 많이 심고 있다. 목재는 건축재, 가구재, 선박용으로 쓰이며, *운명, 봉사(섬김), 장수*를 뜻한다. 또한 *평화로운 마을*의 전통과 향토적인 *믿음*의 “상징”이기도 하다.

*온화하고, 소박하며, 포용성*과 *친근감*을 지니면서도, *강인하고, 굳건하게* 비바람을 견디며, *하늘*로 뻗어가는 느티나무는, *지, 덕*을 “겸비”한 *슬기롭고 의연한 *보건인*의 “기상”과 “품위”를 “상징“한다.*

2) *교표*: *녹색*의 *둥근 원*은, *우주*를 “상징”한다. 또는 “무한”한 *큰 뜻을 품어라*는 *교훈*을 뜻하기도 하며, 어떠한 고난과 역경에도 *생명력*을 잃지않는 *영원불멸*을 상징한다. *안쪽*의 *별*은, *북극성*을 나타낸다. 한 지점의 “목표”를 정하여 *매진(전진)*한다는 것을 나타내며, 가운데 *꽃*은 “국화(나라 꽃)”인 *무궁화*를 “상징”한다. *일편단심, 은근, 끈기, 섬세한 아름다움*을 나타내며, 또한 *우리나라(한국)*의 역꾼임을 뜻하기도 한다. *무궁화*밑의 *월계관*은, *승리자*를 나타낸다. *장애극복 의지*를 기르고, *자신*과의 “경쟁”에서 *승리*를 나타내며, 아울러 *장애*를 “극복”하고, *재활 의지*를 “키우는” *보건인*을 “상징”한다.

 

3) *교화(*장미*)*: 쌍떡잎식물 장미목 장미과 장미속에 속하는, 식물의 총칭이며, 원산지는 *서아시아 지역*이다. 분포지역은, *북반구*의 *한대, 아한대, 온대, 아열대 지역*이며, 약 200종이 알려져 있다. 관목성의 화목(꽃나무)이며, 다양하고 *순결*과 *사랑*을 나타내고, *가시*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을 나타낸다.

*아름답고, 우아하며, 자생력이 강하며, *사랑*의 상징적 표상이며, *희망*적 *미래*를 나타낸다. 따라서 *강인하고, 아름다운 *보건인*을 “상징”한다.*

* 마 라 나 타 *

 

개교: 주후 1967년 4월 29일

705-714 대구광역시 남구 성당로 50길 33 대구보건학교

TEL: 교무실: 053)626-5121, 053)650-8426,

행정실: 053)626-5123, 053)650-8427,

연구실: 053)626-5122, 053)650-8428,

보건실: 053)626-5125, 전공과 053)626-5127,

교장실: 053)626-5120, 053)650-8425,

FAX 교무실: 053)626-4933, 행정실: 053)626-4934.

보건학교 SITE; http://www.bogun.sc.kr.

보건학교 총동창회: http://cafe.daum.net/vocat

 

* 마 라 나 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