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에 입학(주후 1974년 3월 8일~금요일)한 지 며칠이 지난 수요일(주후 1974년 3월 13일) 마지막 3교시 수업이 끝나자, 담임이신 *이 학영 선생님*께서는 1학년인 우리들에게 *내일은 학교급식이 있는 목요일이니깐, 우리 1학년 어린이 여러분들은 도시락 없이 등교하세요.*라고 광고하셨다.
그리고 목요일 아침이 밝아, 나는 외할머니와 함께 도시락 없이 교과서와 공책만 든 가방을 들고, 부산약국 앞으로 나가 때마침 학교버스로 학교로 향했다.
할머니께서 하시는 말씀: *상욱아, 가방에 도시락이 없으니까, 너를 엎고 가방을 들어도 할머니가 힘이 덜 드는 것 같애*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학교에 가니, 벌써 많은 어머니들께서 식당에서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따뜻한 밥과 국을 먹이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셨다.
식당에서 향긋하게 솔솔 풍겨나오는 냄새로, 특히 3교시 수업은..............
그리고 교장선생님께서도, 인자하고 자애로우신 모습으로 3교시에 맞춰 각 교실을 일일이 둘러보시곤 하셨다.
드디어 *3교시 수업이 끝남을 알리는 종과 함께, (분필가루냄새 제거를 위해)교실 창문들이 일제히 활짝 열리는 가운데, 복도는 어수선해지고 목발을 잘못 짚다가 엎어진 친구를 일으켜주려고 안간힘을 쓰는 친구, 친구가 탄 휠체어를 밀어주며 같이 가는 친구, 짝의 손을 꼭 잡고 다정하게 식당까지 같이 가는 다정한 광경까지, 비록 육신에는 장애를 입고 힘겹게 살아가지만 그러나 이런 정겹고 아름다운 모습이, 살벌한 이 경쟁사회를 치유시키는 치유제가 아닐까?*
물론 체질 때문에 특정음식을 못 먹는 자녀들을 위해서도 특별메뉴도 따로 준비하시기도 하셨다.
같이 힘들게 걸으며 밀며 도착한 식당, 벌써 식판에는 펄펄 끓는 국과 기름기 잘잘 흐르는 따뜻한 밥, 그리고 서너가지 반찬이 놓여져, 우리들이 앉은 자리에 놓아지면, 우리들은 큰 소리로 *감사하게 잘 먹겠습니다.*라고 인사를 드리며, 배고픈 육신을 채우기 위해 식사를 한다.
선생님들, 친구들, 선배님들과 한 자리에서 식사를 같이 한다는 기억은, 오래, 오래 기억에 남을 것이다.
같이 식사를 하면서 격이 없이 나누었던 사제 간의 속 깊은 대화, 친구, 선배들과의 대화 속에 알차게 영글어 갔던 우리들만의 진한 우정과 사랑이, 50이 다 된 내 머릿속에 아름다운 영상으로 간직되어 있다.
나도 할머니의 도우심 속에서 밥을 한창, 맛있게 먹고 있는데, 후식으로 요쿠르트가 스트로우와 함께 나오는 것이 아닌가?
나는 그때까지 스트로우로 빨아 마시는 일에 서툴렀던 것이다. 그런 모습을 보신 담임선생님,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는, *상욱아, 너 오늘 저녁부터 스트로우로 빨아 마시는 훈련 좀 해야겠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드디어 나는 담임선생님, 할머니와 어머니의 말씀에 따라, 스트로우로 빨아 마시는 훈련에 들어가 근 2~3개월 훈련한 끝에 역시 후식으로 나온 쥬스를 스트로우로 빨아 마시는 일에 성공하였다.
그런 모습에 담임이신 이 학영 선생님과 할머니, 어머니께서 칭찬하시며 흐뭇해 하셨으며, 나 또한 무척 기뻤다.
그렇게 1학년 여름방학이 다가올 6월 중순쯤 되었을까?....
선생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상욱아, 10년 동안 도움만 받아온 네가 친구의 휠체어를 밀고 같이 간다면 어떻겠니? 물론 힘들겠지만, 그렇게 하면 자신감도 생기고, 너한테 여러 가지 유익한 점도 생기지 않겠니? 선생님은 우리 상욱이가 잘 할수 있을 거라고 믿고 있어, 선생님이 같이 가면서 도와 줄 테니깐 우리 같이 한 번 해보자.*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닌가?
자신은 없었지만 선생님만 믿고, 그렇게 해 보겠다고 말씀드리고 선생님과 같이 현준이의 휠체어를 밀고 식당으로 향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 상욱이 정말 잘 하고 있어.*라는 격려의 말씀으로 계속 나를 독려하시며 식당까지 같이 동행해 주셨다.
선생님과 친구와 같이 도착한 식당, 맛있고 향긋한 음식으로 우리의 미각을 자극하였다.
식당에 모여 계시던 교장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 우리의 많은 어머니들, 많은 선배님들, 그리고 우리 1학년 친구들이 박수로 선생님과 현준이와 울보였던(여름방학 전까지, 할머니께서 내 눈에서 사라지실 때 울기 시작해서, 할머니께서 다시 내 앞에 나타나실 때까지 교실이 떠나갈 정도로 울었음.<~부끄러운 기억) 나를 반갑게 맞아주셨다.
현준이 휠체어의 브레이크를 잠그고 나자, 선생님께서는 손수건으로 내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친히 닦아주셨다.
현준이는 자기 옆에 나란히 앉은 나에게 미소를 보내며, 친근감을 표해주었다.
이 일 이후 나는 현준이와 단짝이 되어, 같이 공부도 하며 학교생활의 대부분을 같이 하였으며, 그런 우리 둘의 모습에 선생님께서도 매우 흐뭇해 하셨다.
1학년 여름방학 이후에는 눈 비 오는 목요일만 제외하고, 현준이의 휠체어를 밀며 식당에도 같이 오가며, 그리고 등. 하교 시간에도 현준이와 같이 행동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리고 현준이의 휠체어를 밀면서 가고 오니깐, 내가 걷는데 더 안정감 있게 보행할 수 있어서,............
선생님께서는, 입학 초기부터 어린 나를 할머니의 치맛폭에서 떨어뜨려(?) 이제 막 시작한 학업과 학교생활에 적응시키기 위한 여러 방안들을 생각해 오셨던 것 같았다.
그리고 *선생님께서는, *어린 내가 할머니 품을 떠나더라도(?) 선생님의 보살핌 속에서 얼마든지 생활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이다.*
할머니와 어머니께서도, 현준이 옆에 나란히 앉아 식사하는 나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며, 반찬만 숟가락에 얹어주셨다.
비록 *육신에 장애를 입었지만, 장애인들도 진한 우정과 사랑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을 학교급식을 통해 보여주고 싶으셨던 것 같다.*
특히, 2학년의 미연이 선배님은, 손에 장애가 심해 선생님, 그리고 친구들의 도움으로 식사를 하시고는, 언제나 *선생님, 감사합니다. 영란아 고맙다*라는 인사를 늘 잊지 않으셨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나 여러 사정으로, 학교급식은 우리 8기가 2학년으로 진급하던 1975년 봄에 아쉽게도 중단되어, 우리들의 기억속에 아련한 향수로 자리잡고 있을 뿐이다.
* 마 라 나 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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