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성령*잉태와 동정녀 출생 교리에 대하여

밀알공동체 시나브로 2023. 12. 25. 19:08

                                 * *성령*잉태와 동정녀 출생 교리에 대하여

                                         *마 1:18~23, 눅 1:24~38* *

                                                             *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들 *

 

**예수님*이, 이 땅에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신 날을 기억하고, *평화*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오심*을 기다리는 *대림절*과 *성탄절*이 가까이 오면, 교회공동체나 신학의 저변에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많은 이야기들이 들려옵니다. 특히 *복음서*의 이야기들이 서로 혼합되어, 하나의 이야기로 각색되고 얽혀져서 연극이나 설교에 인용이 된다.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 지금까지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는 부분은, *예수님*이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마리아*가 처녀(동정녀)로 *예수님*을 낳았다는 것이다.*

 

주후 100년경부터 로마에서 고백되기 시작하여, *사도신경*으로 정착된 신앙고백문에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성령*으로 잉태되어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나시고*라고 고백드린다. 이 *성령*으로 잉태와 *동정녀 탄생*은, 기독교에 대하여 어떤 식으로든 반감을 표현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공격하기 쉬운 표적이 된다. 또한 기독교인 중에서도, 현대의 생물학적인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이 두 교리(=*성령*잉태&동정녀 탄생)를 믿음의 목록에서 제외시키는 이들도 있다. *개신교인들*중에는, 카톨릭 전통에서 동정녀 탄생에서 시작된 마리아 숭배를 반대하기 위해서, 두 교리(=*성령*잉태&동정녀 탄생)를 중요하게 취급하지 않으려는 경향도 있다.

 

**성령* 잉태*와 *동정녀 탄생*이라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는 두 교리는, 예나 지금이나 이해와 믿음의 기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믿음*은 이성이나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것을 받아들이는 행위이며, 두 교리는 웬만한 믿음으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과 마찬가지로, *성령*으로 *잉태*와 *동정녀 탄생*을 확실하게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기독교인*이냐? 아니냐?를 구별할 수 있는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은, 주후 117년 - 이그나티우스가 가현설을 비판하면서 주장하기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다. 영지주의(*예수 그리스도*의 *신성*만 인정하며, *예수님*의 *인성*은 부인)자들이 주장한 가현설은, *예수님*이 인간의 육체로 태어나신(generatio) 것이 아니라, 인간의 육체의 모습으로 나타나셨다(doceo)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마리아를 통한 육체적 출생을 강조하게 되었다. 상대적으로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성경적 표현은 등한시되었다. 게다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논의가, 중세시대를 거치는 동안에 마리아 교리로 확대되어 논지를 잃었다.

 

*성경*과 *교회*의 역사 사이에서 성경의 의미가 잘못 적용된 사례들이 많이 있는데, 그 유형을 보면 어떤 성경의 내용이 교리화 되어 왜곡된 경우와 성경의 의미 자체가 현실에서 왜곡=보수화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한 왜곡 때문에, 현대 신학자들 중에서 동정녀 탄생 교리에 회의적인 이들도 많이 있다.

*성령*으로 잉태에 대한 악의=보수적인 공격은, 헬라 철학자 켈수스(Celsus)의 주장이 대표적인 것이다. 켈수스는, *예수님*은 마리아와 로마군인 판테라(Phantera)사이의 사생아였다고 주장하였고, 이에 대하여 오리겐(Origen)은, 켈수스 반박서에서 조목조목 비판하였다. 켈수스에 의하면, 물레질로 생계를 꾸려가던 시골의 가난한 여인인 마리아는 한 로마군인 판테라와 불륜 관계를 맺고 임신하였기 때문에, 목수인 남편 요셉에게 버림받고 떠돌아다니다가 *예수님*을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악한 보수적인 주장은, 지금까지도 안티 *기독교*사람들에 의해 계속해서 인용되고 있다.

이러한 *예수님*의 *탄생*에 대하여 해석하는 데 있어서, 여러 가지 신화나 영웅탄생 설화 등이 인용되었다. 조로아스터교의 경전인 아베스타(Avesta)는 페스시아 신화를 담고 있는데, 세계의 종말을 앞두고 세(3)명의 구세주가 1000년의 간격으로, 동정녀의 몸에서 태어난다고 한다. 조로아스터 사후 천 년이 지날 때마다, 아우쉐타르(Aushetar), 아우쉐타르마(Aushetarmahh), 사오쉬안트(Saoshant)가 구세주로 출현한 후 세계의 종말이 시작되는데, 조로아스터는 이 *세(3) 구세주*의 아버지라고 한다. 조로아스터의 정액이 페르시아의 한 호수속에 기적적으로 보존되어 있다가, 동정녀가 그 곳에서 목욕하여 위대한 인물을 임신하게 되어, 태어나는 아들이 *구세주*가 된다고 한다. 이처럼 고대의 신화나 전설에서 영웅이나 위대한 인물의 배후에는, 잉태될 때부터 남다른 모습을 하고 있다.

 

*마리아*가, *남자를 알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예수님*을 잉태하고 낳았다는 기록*이, *마태복음서*와 *누가복음서*의 증언이다. *복음서*에 나오는 *처녀*를 *젊은 여자*로 *번역*하면서까지 합리적으로 해석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다. 현대인의 상식으로 이해하거나, 설명하기 어렵다고 성경의 기록 및 이야기를 바꿀 수는 없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그 기록과 이야기가 그 시대에, 그 공동체에 어떤 의미가 있었고, 또한 오늘 우리에게 어떠한 메시지를 주는가?*하는 것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것과 처녀가 낳았다는 것은, 같은 사건의 다른 표현이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표현은,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기적과 표적의 근거와 내용이고, *처녀가 아이를 낳았다*는 표현은, 형식과 외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카톨릭의 마리아 교리와 동정녀 탄생이 연결되면서 서로 분리된 것처럼 인식되어 있다. *성령*에 의한 잉태의 의미를 찾는다면, 동정녀 탄생의 의미도 함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나이가 많아서 잉태하지 못하던 여인들이, 기적처럼 아이를 낳은 기록들이 성경에는 많이 있다. 세례=침례 요한의 어머니: 엘리샤벳을 비롯하여, *창세기*에 나오는 족장들의 어머니들인 사라*창 21장*, 리브가*창 25장*, 라헬*창 29장,30장*, 그리고 사무엘의 어머니인 한나*삼상 1장,2장*가 그렇다. *자녀* 즉 대를 이어줄 후손이 없다는 것은, 모든 가부장제 사회 속에서 그렇듯이 이스라엘에서도 큰 수치로 여겨졌다.*창 16:4,/11,/29:32/30:1,/23,/삼상 1:5~7* 이것은 여자에게는, 더욱 심각하게 적용되는 문제였을 것이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녀*를 통해 *구원*의 때까지 *생명*을 이어간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자녀가 없다는 것은 *생명*이 끊어지므로 *구원*의 때를 보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 때문에 아기를 낳지 못하는 여인이, 멸시와 부끄러움을 당한 것은 당연했을 것이다. 유대 랍비(=스승)들은, *하나님*앞에서(*Coram Deo*)* 파문당하는 일곱가지 유형의 사람들의 예를 들고 있는데, 그 목록의 서두에 유대인으로서 아내가 있는 자, 또는 아내가 있는데도 자녀가 없는 자라고 되어 있다. 자녀가 없다는 것은, 이혼의 정당한 조건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아이를 잉태하고 낳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가? 엘리사벳의 수태는, 엘리사벳&사가랴 부부에게 구원의 때와 관련된 큰 기쁨이었다. 그 기쁨은, 엘리사벳&사가랴 부부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그(=엘리사벳&사가랴 부부)를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기쁨이 될 것이다. 엘리사벳은 엘리사벳 자신의 수태를 *하나님*의 개입으로 인정하며, 이제는 부끄러움과 수치에 잠겨있을 필요가 없었다.

 

그러나 마리아는, 조금 상황이 다르다. 남자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아기를 잉태했기 때문이다. 엘리사벳은 아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상황이었지만, 마리아는 아직 임신을 하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더 엄격히 말한다면, 약혼한 여인이 남편과 무관하게 임신을 했다는 것은, 생명의 위협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창 38장*의 유다의 며느리인 다말이 친정으로 쫓겨난 후에 임신한 소식을 들었을 때, 유다는 다말을 화형에 처하겠다고 하였다.

 

*고대 이스라엘에서의 여자 아이들은, 12세 혹은 13세가 되면 이러한 가족간의 합의를 통해 *약혼*을 하게 되었는데, 그 기간이 1년이 계속되면 결혼과 같은 구속력을 발휘했다. 약혼은 결혼과 동일한 성(sex)적인 제약을 여자에게 가했고, 남자에게는 그 제약을 어긴 여자를 처벌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약혼한 사이에 남자가 죽으면 그 상대의 처녀는 법적으로 과부로 간주되었고, 율법에는 과부 처녀라는 말이 있다.

따라서 가브리엘 천사로부터 잉태의 소식을 들은 마리아는, 죽음의 그림자가 자신(=마리아)을 덮는 듯한 위협을 느꼈을 것이다. *천사(가브리엘)가 전해준 잉태의 소식을 마리아가 선뜻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가 *하나님*의 구원 사역을 위해 태어날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아이는, 보수와 죄악의 세상을 구원하기 위한 소명을 가지고 잉태되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거나 처녀에게서 태어났다는 것은, 그 아이의 *소명*에 극적인 긴장감을 준다.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는, *하나님*의 *성령*이 가장 독특하고 특별한 방법으로, 그(=*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에 활동하셨다*는 것을 보다 아름답고 시(poems)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유대인들은, 어느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고, 오직 *하나님*만이 가지고 계신 3개의 열쇠가 있다고 생각했다. *비를 내리며 햇살을 비추는 일, 죽은 사람을 다시 살리는 일, 그리고 여인의 태를 열어주는 일*이 그것이다. 또한 유대인들은, 모든 아이들이 출생하는 데에는 3분의 동역자, 즉 *하나님*의 *영*, 어머니,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성령*의 역사 없이는 결코 아이를(가) 출생할 수 없다고 믿었다.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에 있어서 중요한 점은, 그 사건(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잉태와 탄생)이 개인이나 가족 혹은 모든 사람의 구원과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하나님*의 구원사건이 이 땅에 펼쳐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를 낳게 하는 일이 *하나님*의 고유한 일인 것처럼, *하나님*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소명*을 가지고 태어난 모든 아이는, *성령*에 의해 잉태된 것이다.* 유대인들에 의하면, 여인의 태를 열어서 아이를 낳게 하는 원천 기술이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한 생명*의 *탄생*은, *하나님*이 *하나님 자신*의 에너지를 나누는 일*이라는 말처럼, 한 사람의 탄생과 그 사람이 생명을 누리는 것은, 그 사람으로 인해 펼쳐질 *하나님*의 뜻이 있기에 소중한 것이다.

 

*성경*에서는, 분명히 마리아가 처녀=동정녀 일때에 *거룩한 영*에 의해서, *예수님*을 *잉태*하였고 *출산*하였다고 말한다. *처녀가 애(=아기)를 배도 할 말이 있다*라는, 우리 속담이 있다. 마태 기자는, 이 속담(처녀가 애(=아기)를 배도 할 말이 있다)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 듯하다. 처녀인 마리아가 애(=아기)를 배었는데, 마태 기자는 이(동정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임신한 일)를 적극적으로 보도한다. 이는 이스라엘 역사의 위대한 사람의 치부까지도 보도하고 있는 것과는 엄연히 다르다. 그러면 마태 기자와 누가 기자가, 굳이 마리아의 처녀 임신을 적극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에 세계의 평화를 지키는 구원자로서의 로마 황제는, 다른 영웅 탄생 이야기에서 많이 등장하는 것처럼, 신적인 능력에 의해 처녀에게서 태어났다고 한다.(플라톤, 알렉산더, 시이저, 아우구스티누스 등). 그러나 마태 기자나 누가 기자는, *예수님*이 처녀에게서 탄생하셨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정복과 지배에 의해서 평화(peace)를 만드는 로마 황제를 대신하여 진정한 평화(샬롬:=*하나님*의 평화)를 가져다 줄 사람은,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세례=침례 요한과 *예수님*의 잉태를 알리는 가브리엘 천사는, 이와 동시에 *예수님*과 세례=침례 요한의 소명/사역에 대해서 자세히 알려준다. *이스라엘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고, 보수적인 죄로 인하여 구속된 사람들을 해방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그 소명을 전달하고 일깨워 주는 것은 부모의 몫이고, 또한 그 소명을 자기의 것으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것은 각자의 몫이다.*

인도의 아이들은, 태어나면서 *코함, 코함(ko ham, ko ham)*하면서 운다고 한다. 같은 울음소리인데. *우리*에게는 *응애, 응애*하고 들리는 것이라 하겠다. *코함*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산스크리트 어(말)라고 한다. 인도 사람들이 전해주는 *가르파 우파니샤드*에는, *어머니의 자궁 속에 있는 태아가 일곱 달이 되면, 그 영혼에게 과거, 미래의 지식이 전해진다고 한다. 이때 아기는 자신이 과거에 무엇이었으며, 미래에 무엇이 될 것인지를 알게 되는데, 세상에 나오는 순간 그것을 잊고 코함, 코함 하고 자기를 찾는 것이라고 한다. 태어나면서 시작된 물음이, 점점 자라면서 진정한 자기를 찾고, 소명을 깨닫기 위한 시작이다.*

이미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른이 된 사람들이나, 아직 어린 사람이나 이제 태어날 사람이나, 자기의 존재와 소명을 깨닫는 그 순간에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다. 그 일을 위해서 지금도 우리 안에서, 우리 앞에서 *성령*의 움직임이 계속되고 있다. 우리가 숨 쉬는 순간, 순간이, 모두가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시간이고, 삶의 의미를 펼치기 위한 시간이다. 지금 우리는 어떠한 삶을 살고 있으며, 우리에게 주어진 생명을 어떻게 펼치고 있는가? 우리에게, 그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이 병일(서울 동노회, 강남 향린교회 목사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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