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주부활동(주후 1975년 가을~1979년)
초등학교 2 학년 가을이 되자, “그 동안 중등부 선배님들이 하셨던, 합주부 활동을 끝내고, 학업에만 전념하겠다”는 소문이 교내에 퍼지기 시작하였다.
초등부를 담당하시던, 담임선생님들께서도 수업 시간 마지막이 되면, 합주부원 모집 안내를 어김없이 하셨다.
그때까지 음악에 대해, 별 흥미를 느끼지 못했던, 나에게 담임선생님과 담당선생님께서 합주부 활동을 강력하게 권하셨고, 합주부 활동 신청에 우리 2 학년 급우들이 제일 많아, 내가 합주부 활동을 안 하면, 괜히 왕따가 되어, 나 혼자만 외톨이로 남아, 앞으로의 학교생활이 몹시 힘들어질까 봐, 합주부 활동에 나(=*상욱*)도 참여하기로 했다.(“나”=“*상욱*”이는, “탬버린”을 맡았다.)
합주부에 가입하면서 무미건조한 나(=*상욱*)의 생활에, 미미하지만 작은 변화들이 일어나기 시작하였는데, 그 가운데 두 가지 변화가, “긍정적(=진보적) 생활 방식”과 “자신감”이었다.
수업시간이 한창 진행되다가도, 스피커를 통해, “오늘 손님들이 오십니다. 우리 합주부원들은 합주부실로 모여 주세요”, 라는 방송이 나오면, 선생님들의 배려로, 우리들은 합주부실로 한 명씩, 두 명씩 모여, 자기 악기에 묻은 먼지 등을 청소한 다음, 음을 맞춰 보다가 담당 선생님께서 들어오셔서, 몇 차례 연습하다가, 질서 있게 3층 강당으로 올라가 각 학교 별(영화학교, 보건학교, 광명학교, 보명학교)로 지정된 좌석에 앉아, 기다리다가 손님들이 오시면, 경쾌한 밴드 연주로, 아름답고, 섬세한 합주로, 우아한 부채 춤 등으로 아름다운 예술을 전달하였다.
그리고 모든 정규 수업 시간이 끝날 무렵, “오늘도, 손님들이 오시니, 우리 합주부원들은 지금 출발하는 차를 타지 말고, 아름다운 합주를 보여 드립시다.”라는, 담당 선생님의 방송이 나오면, “오늘 숙제는, 합주부원들만 면제다”라는, 담임선생님들의 선언과 함께, 교실 안은 시끌법적, 술렁거린다.
모든 수업 마치고, 손님 오시는 날이면, 마음 좋으신 기사 아저씨의 배려로, 하교 차량을 우리 합주가 끝날 시간에 맞춰, 한 번 더 운행해 주셨다.
그러나 손님의 사정으로 안 오시는 날에는, 허탈한 심정으로 늦게 학교차를 타고, 밤에 귀가하곤 하였다.
3 학년 가을, 서울에서 개최되었던 경진대회는, 우리 합주부가 새로 구성된 이후, 처음으로 참가하는 경진대회라, 준비하는 과정부터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그러나, 최선을 다해 준비하였다.
연주곡을 미국의 민요인, 경쾌한 “즐거운 여행자”로 정하고, 2 학기 초반부터 본격적인 준비에 들어가, 눈코 뜰 새 없이 생활하다가, 대회 하루 전에 우리 보건학교 팀은 학교차도 모자라, 관광버스까지 대여해, 서울로 향했다.
교장 선생님 이하 여러 선생님들의 특별하신 배려로, 다른 팀에 속한 선배, 후배들과 우리 합주부는, 각각 다른 차로 서울로 향했다.
차 안에서도, 열정 많으신 담당 선생님의 지도로 연습 하느라, 차 안은 후끈, 후끈 달아올랐다.
드디어, 서울에 도착한 우리들은, 여장을 풀고 휴식을 취하며, 내일의 대회를 준비하였다.
여관에서도, 다른 종목에 출전하는 선배, 친구, 후배들과 달리 우리 합주부는, 마무리 연습을 하느라 바쁘게 움직여,.....................
대회 당일이 밝자, 우리 합주부는 다른 팀들보다 먼저 대회 장소에 도착하여, 약간 긴장된 마음으로, 준비에 비지땀을 흘렸다.
음악 경연으로 시작된 경진대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열기가 고조되어 갔다.
우리 합주부는, 구성된(1975년 11월)지 1년도 채 안된 신생팀이어서 분위기에 압도되어 위축될 뻔 하였으나, 담당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 선생님들의 아낌없는 격려로, 마음을 가다듬어 순서를 기다려, 우리들이 피땀 흘려 준비한 아름다운 화음을 전달하였다.
우리의 걱정과는 달리, 본선에서는 아주, 아주, 아주 아름답고, 정교함으로 우리 학교의 신생 합주부는, [*하나님*]의 은혜로,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다.(*주님*, 너무, 너무, 너무 감사드립니다. 아멘.)
성적 발표를 듣는 순간, 우리 합주부원들은, 지도 선생님(=*하 성자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의 선생님들 품에 안기며, 수상의 기쁨을 함께 나누었다.
대회가 끝나자, 다른 팀들은 여관으로 가고, 우리 합주부원들은 선생님들과 함께 서울 관광을 하며, 즐겁고 유익한 시간을 보내다가 여관으로 향했다.
이튿날, *이 순신* 장군을 모신 현충사 유적지를 관람한 후에, 학교로 돌아왔다.
경진 대회는 끝났지만, 우리 합주부는 연습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학교를 방문하시는 손님들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늘 연습하며, 준비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이 긴장의 끈을 놓을 때면, 담당 선생님께서는 꾸중이 아닌, “어머니”의 사랑의 마음이 담긴 말씀: [우리들이 아까운 수업 시간까지 반납(?)하며, 또 시간을 쪼개가며 합주를 하는 것은, 우리가 비록 장애인이지만 장애인들은, 늘 도움을 받아야 하는 애물단지가 결코 아니라, 오히려 다른 사람들에게 “희망”과 “사랑”을 전해 주기 위함]을 하시면서, 우리들을 한 마음으로 묶어 주셨으며, 어린 우리들이지만, 담당 선생님을 비롯한, 여러 선생님들의 따뜻한 격려로, 열심히 해 나갈 수 있었다.
교장 선생님의 특별 배려로, 우리 합주부원들은 단복도 맞추었다.
준비할 때, 화음이 좀 떨어지고 고르지 않을 경우도, 우리들이 자진해서 더욱 많은 준비와 연습을 기울인 결과, 담당 선생님의 사랑과 열정의 지도와 맞물려, 더욱 더 곱고 아름답고 성숙한 화음으로 만들어 나갈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합주에만 매달려, 학업도 소홀할 수는 없었다.
아니, 결코 소홀히 여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 합주부원들에게 있어서, “학업 생활“과 “합주 생활“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 되어 있었다. (벌써, 우리들의 학교생활 핵심의 일부로, 자리 잡은 [합주부] 활동!)
방과 후에 손님들이 오실 경우, 우리 합주부만 남아, 손님 영접한 후에, 파김치가 되어 귀가하지만, 우리 합주부원들만의 자부심은 매우 강하였다.
그것은, [우리 합주부가, 우리 학교를 대표한다!]는 것이었다.
우리 합주부원들은, 눈빛만 봐도 서로를 잘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리고 우리 합주부원들만의 단합도 잘 이루어지며, “사랑”과 “정”도 더 끈끈해졌다.(모든 선후배, 합주부에 참가하지 않은 친구들도, 우리 합주부를 매우 부러워 할 정도였다.)
맞춘 단복이 학교에 도착하자, 우리 합주부원들은 합주실로 모여, 단복을 입어보며, 맵시를 뽐내며, 얼굴에는 환한 미소로..............
난, 짝꿍(=*효정*이)의 도움으로 단복을 입고, 탬버린을 더 힘차게 흔들어 보기도 하였다.
그랬더니, 탬버린 소리가 더 힘차고, 아름답게 들렸다.
그런데, 나의 실수 아닌 실수(?)로, 작은 수치의 단복을 입었다가, “후배의 단복을 내가 입었다”(어쩐지, 작더라 했네..............)는 말씀을 담당 선생님께로 듣고 단복을 벗고, 선생님께로부터 받은 나의 단복을 입고, 합주를 무사히 마치는, 해프닝 아닌 해프닝도 겪기도 하였다. (앗, 나의 실수.)
그러나 나의 단짝은 나의 실수를 일부러 보지 않고,..............(*효정*아, 고맙고, 고마워).
그렇게, *효정*이는 학업 생활과 합주부 활동에 있어서, 언제나 내(=*상욱*이) 곁에서 나(=*상욱*이)만을 꼼꼼하게 보살펴 주었다.
나는, 그렇게 학업도, 합주부 활동도 *효정*이의 꼼꼼한 보살핌 속에서 잘 할 수 있어, [*하나님*]께 감사드렸으며(*하나님*, 정말, 정말, 감사드립니다. 아멘.), 그렇게, 변함없이, 꾸준하게, 언제나 내 (=*상욱*이)곁에서 나(=*상욱*이)만을 꼼꼼하게 보살펴 주는, *효정*이 또한 천사같이 여겨졌다.
나(=*상욱*이)의 게으름(=연습 부족)으로 내(=*상욱*이)가 풀이 죽어 있을 때, *효정*이만큼은 내(=*상욱*이)곁에서 나(=*상욱*이)를 위로해 주며, 격려해 주었다.
그렇게, 바쁜 학업 생활과 합주부 생활의 연속이라,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지만, 마음만은 형언할 수 없는 기쁨과 행복으로, 가득 차 있음을 느낄 수 있었음에 감사했다.
벌써, 우리 초등부가 합주부를 담당한 지도 2년, 아름다운 화음을 어느 정도 갖추어 갈 무렵이었지만, 초등학교 졸업이 2년 앞으로 다가옴에 따라, 합주부 활동도 마무리해야 할 시간 역시 2년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초등학교 졸업과 함께, 합주부 활동 역시 마무리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뿔싸, 78년 서울에서 개최된, 경진대회는 우리 합주부가 소속된 음악부가 포함된 대회로서는, 마지막 경진대회였다.
경진대회에서, 음악부를 제외시키는 이유는, 음악부에서 수상하는 상이, 너무 많기 때문이란다.
역시, 우리 합주부는, 다른 팀에 속한 선배, 친구, 후배들과 각각 다른 차량을 이용해, 서울로 향했다.
나는, 단짝 *효정*이와 같이 앉아, 대화를 나누다가 선생님의 지도로 연습에 들어가,..........
“우리 합주부가 포함된 경진대회로써는, 마지막(?) 경진대회라 유종의 미를 거두리라“고, 우리 합주부원들은 결의를 다졌다.
*효정*이와 나(=*상욱*이)는, 내(=*상욱*이)가 단복 입을 때, *효정*이가 도와주기로 서로 약속하였다.
여관에 도착한 우리들은, 여장을 풀며 휴식을 취하다가, 저녁 식사 후에 자유 시간을 가지다 취침했다.
대회 당일이 밝자 우리 합주부원들은, 좀 일찍 서둘러 단복 차림으로 대회 장소로 먼저 출발했다.
나(=*상욱*이)는, 나의 단짝(=*효정*이)의 도움으로 단복으로 갈아입고, 탬버린을 점검했다.
드디어, 음악부의 경연으로부터 시작된 경진대회는, 시간이 흐를수록 열기를 더해갔다.
특히 합주는, 전체 화음이 중요하기에, 화음 맞추기에 신경을 쏟아.............
막상 이번 대회가, 음악부가 포함된 경진대회로써는, 마지막(?) 경진대회라는 것을 눈치 챈 우리들은, 우리들이 1년 가까이 준비 한, 더욱 더 곱고 아름답고 향기로운 화음으로, 전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우리 보건학교 합주부는, 79년을 끝으로 마무리하고, 후배들이 이어서 하겠지만, 더 이상 경진대회에서는, 아름답고 힘찬 합주를 포함한 음악 경연은..................
“다음 대회부터는, 대회의 꽃인 음악 공연을 펼칠 수 없다”는 많은 아쉬움 속에서, 78년 경진대회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모든 일정을 마친 우리학교 팀은 곧바로 여관으로 향했다.
이튿날, 부여의 백제 유적지를 관람하고, 대구의 보건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우리 합주부는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학교를 꾸준히 방문하시는 손님들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우리 합주부 만큼은 늘 준비되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초등학교 졸업하면, 우리 합주부 활동이 우리들의 기억 속에 가장 오래 남아 있겠구나!]라는, 생각을 해 보았다.
초등학교 생활과 합주부 활동을 동시(?)에 마무리해야 할 6 학년으로 진급하였다.
경진대회에서 우리 합주부가 소속된 음악부가 제외됐다 해서, 합주부 활동을 등한시(?) 할 수는 없었다.
79년 12월 초에 오셨던, 손님들 영접을 끝으로, 합주부 활동을 [*하나님*] 안에서 아름답게 모두 마무리했다.
그 동안의 합주부 활동에서, 기억에 남는 아름다운 추억들은 다음과 같다.
[중등부 선배님들이 하셨던, 전통의 합주부를 우리 초등부가 전담해서, 연습하며 처음 데뷔(?) 무대를 긴장하며 섰던 일, 손님들이 늦게 오시면, 수업 끝난 친구들, 선배들, 후배들은 학교 차량으로 귀가하는 데, 우리 합주부원들만큼은 학교에 남아, 오시는 손님들 영접한 후에, 밤에 귀가하던 일, 경진대회에 출전했던 일, 새로 맞춘 단복을 입고, 신나게 합주하던 일]등이, 우리들의 머릿속에 아름답게 떠올랐다.
이렇게 큰 어려움 없이, 우리들이 합주부 활동을 아름답게 마감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하나님*], 교장 선생님을 비롯한. 학교의 모든 선생님들, 우리들의 어머님들, 할머님께, 그리고 아버지들에게 깊은 감사를 드린다.
* 마 라 나 타 *